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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이끈 해공 신익희 선생 서거 61주기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직을 역임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신익희 선생을 기리는 ‘해공 신익희 선생 61주기 추모식’이 5일 오전 11시 서울 수유동 신익희 선생 묘전에서 (사)해공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렸다.

추모식에는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 박유철 광복회장, 유용태 대한민국헌정회장, 윤경우 국민대학교 대외협력부총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기념사업회원, 시민 등이 참석했다.

윤경우 대외협력부총장은 추모사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하고 원대한 뜻이 담겨 있는 우리 국민대학교가, 해공선생님의 61주기와 함께 올 9월에 개교 71주년을 맞이하게 된다"며, "해공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아 우리 대학은 인재상과 교육목표를 ‘공동체 정신’과 ‘실용주의’로 정하고, ‘도전하는 국민인, 세상을 바꾸는 공동체적 실용융합인재’ 양성을 위해 매진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청년 해공들’을 양성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선생은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해 1908년 한성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 고향에 동명강습소를 열었다. 졸업 후에는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가 됐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해외 연락 업무를 맡았다. 그해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고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기여했다.
 
그와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차장, 내무·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외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임시정부를 통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학장을 역임했다.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으로, 1948년 제헌국회 부의장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1949년에는 민주국민당을 결성해 위원장에 취임했다.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의장에 지명·피선됐다. 이후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 발전시켜 대표 최고위원이 됐다. 1956년에는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유세 중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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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책브리핑 해공 신익희 선생 서거 61주기 추모식
4 뉴시스 5일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 61주기 추모식 거행
5 이데일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의 '산파', 해공 신익희 61주기 추모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