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직을 역임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신익희 선생을 기리는 ‘해공 신익희 선생 63주기 추모식’이 5일 오전 11시 서울 수유동 신익희 선생 묘전에서 (사)해공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렸다.
추모식에는 국민대학교 윤경우 대외협력부총장, 김인준 학생처장 및 직원과 학생대표를 비롯해 손학규 바른미래당 당대표, 박겸수 강북구청장 및 각계 인사와 기념사업회원, 시민 등이 참석했다.
윤경우 대외협력부총장은 추모사에서 "해공 선생님의 교육 철학은 ‘국가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복되게 한다’ 는 ‘國利民福’이고, ‘국민대학교’의 ‘國民’이라는 교명이 이런 깊은 뜻을 품고 있다"며, "국민대학교는 앞으로 통일 조국을 이끌어갈 '청년 해공들'을 양성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또한, 이날 참석한 손학규 바른미래당 당대표는 추모사에서 "선생께서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 땅에 뿌리내리려 노력을 아끼지 않은 분이십니다. 일제와 독재에 맞서 집중된 권력을 대한민국으로, 국민들에게로 되찾아 오려고 평생 절대 권력과 맞서 싸우셨다."며, 해공 신인희 선생의 숭고한 애국ㆍ애족의 정신을 되새겼다.
선생은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해 1908년 한성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 고향에 동명강습소를 열었다. 졸업 후에는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가 됐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해외 연락 업무를 맡았다. 그해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고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기여했다.
그와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차장, 내무·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외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임시정부를 통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학장을 역임했다.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으로, 1948년 제헌국회 부의장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1949년에는 민주국민당을 결성해 위원장에 취임했다.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의장에 지명·피선됐다. 이후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 발전시켜 대표 최고위원이 됐다. 1956년에는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유세 중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