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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밀리터리·젠더리스’ 패션 선구자 장광효 “친구들은 다 장군님”/ 장광효(장식미술학과 76) 동문


장광효 디자이너가 직접 디자인한 ‘카루소’ 의상들 앞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장광효(59). 그의 ‘카루소’(CARUSO)가 30주년을 맞았다. 그는 “패션계를 떠날 때가 됐나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시 새롭게 시작할 때’라는 동료·선후배의 조언에 창작 활동에 더욱 매진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실제 지난 17일 서울패션위크에서 진행된 ‘장광효 컬렉션’에서는 트레이드마크인 기존의 우아하고 클래식한 의상 대신 젊고 자유로우며, 파격적이다 싶을 정도로 한층 다양해진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30주년을 변곡점으로 재탄생한 ‘울트라 카루소’가 그것. 화려한 색상과 유행을 완전히 무시한 새로운 스타일의 의상들은 장광효가 말하는 새로운 시작, 즉 ‘모든 취향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노장은 죽지 않았다!

 

김성일(이하 김) 장광효는 우리나라 패션계 1세대인 앙드레 김(1935~2010)과 여든이 넘은 진태옥을 잇는 1.5세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지. 30년이면 정말 대단하네. 특히 ‘카루소’는 국내 연예인의 문화와 패션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어. 특히 남자 연예인 패션만큼은 장광효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장광효(이하 장) 과찬의 말씀! 디자이너로 오랜 시간 한 우물을 팠기 때문에 보이는 착시효과 아닐까? 앞으로는 나보다 패션과 문화 발전에 영감을 주는 디자이너들은 많아질 거야.

문화 발전 하니까 생각나는데, 장광효는 패션도 패션이지만 언론과 매스컴 노출이 많은 디자이너였지?

아, 시트콤 출연한 것?

장광효는 2005년 <문화방송>의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디자이너인 엘리자베스(정려원)의 스승 역할로 연기를 선보인 적이 있다. <소울메이트>엔 카메오로 출연도 했다. 어눌하면서도 잘 망가지는(?) 패션디자이너 역할이어서 자칫 ‘장광효’란 명성에 누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오히려 솔직하면서도 담백한 연기로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패션디자이너에 대한 관심과 인식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땐 거절했지. 망가지거나 웃기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 도통 자신이 없었으니까. 애초엔 카메오였는데, 첫 반응이 너무 좋아 고정 출연하게 된 거야. 나중엔 ‘핑크레이디’(이수나)와 김원철 건축가와 삼각관계로도 엮이고.(웃음) 생뚱맞았지만, 참 잘했구나 싶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사람들은 2% 부족한 사람들을 귀엽게 봐주고 예뻐해주는 것 같아.

배우로 계속 활동해볼 생각은 없었어?

재밌게 하기는 했어. 처음엔 책 읽듯 했지. 연기가 정말 어색했는데, 나중엔 애드리브도 치고 했을 정도니까. 무엇보다 무게 잡지 않고 떠들며 활발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깨달았고. 근데, 대사 외우는 게 정말 힘들더라고.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고. 무엇보다 난 내 일을 너무 사랑하기도 하고.

내가 장 선생을 알게 된 게 대학교 4학년인 1993년이었어. 친구 중에 장광효 옷을 맞춰 입는 친구가 있어서 알게 됐지. 내가 런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진태옥, 박윤수, 이상봉, 장광효 등 국내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를 인터뷰할 기회를 얻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그 이후로 어느 디자이너보다 더욱 각별하게 선생과 친분을 유지해온 거 같아. 벌써 25년이네.

김성일이 카루소의 역사네. 오래 알다 보면 싸우기도 하고, 안 보기도 하는데, 우리는 꾸준하게 좋은 사이로 지내왔네. 지금껏 다툼을 한 적이 없어.
 


김성일(왼쪽)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광효 디자이너.

장광효의 카루소는 1987년 론칭한 뒤 ‘2018 S/S 헤라서울패션위크’까지 매년 크고 작은 패션쇼에 꾸준히 참가했다. 그만큼 시즌마다 유행을 좇지 않고 그만의 정체성과 스타일을 지켜왔다는 뜻이다. 그의 재능과 끼, 열정과 노력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의 이런 노력은 카루소뿐 아니라 우리나라 패션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비를 들여 1993~96년 파리 컬렉션에도 진출했다.

 

파리 컬렉션 출품할 때 건물을 팔았다지?

하하. 그랬지.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일본의 대표적인 패션디자이너 잇세이 미야케, 요지 야마모토 등은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파리에서 일본의 패션을 알렸잖아. 지금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디자이너의 반열에 올랐고.

지금은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사치 조장 사업 한다는 인식이 컸어. 파리 갔다 오면 (그 돈이 어디서 나왔나) 세무조사 하고 그랬지. 세금 나눠 내느라고 나 그때 죽는 줄 알았어. 이후에 아이엠에프(IMF)까지 터져서, 망했지.(웃음) 매장 수가 40개가 됐는데, 다 철수했으니까. 디자인은 잘하는데 경영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과감하게 사업을 축소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잘한 거 같아. 그만큼 카루소의 내실을 탄탄히 다질 수 있었으니까.

 

차라리 15~20년 늦게 태어났으면 더 좋았을 뻔하지 않았을까?

지금 파리에 진출했다면 상황이 더 좋았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후회는 안 해.

후배인 우영미, 정욱준 등이 지금 파리에서 활동하잖아. 충분히 좋았을 거야. 그나저나 어떻게 패션디자이너가 될 생각을 했어?

우리 가족 중에 옷 관련한 직업을 가진 사람은 없었지만, 가족들이 예술을 좋아했던 것 같아. 아버지는 클래식에 심취했고, 형과 누나들도 소설을 즐겨 읽었지. 그 덕에 나도 자연스레 그림에 관심을 가졌고. 대학 진학할 때 의상학과를 가고 싶었어. 근데 당시만 해도 의상학과는 여자들만 가는 과였어. 시각디자인 전공하면서 부전공으로 의상학을 택했지. 내가 우리나라 최초의 의상디자인학과 남학생이야.

 

장광효는 전기 입시에서 서울대 서양화과에 떨어진 뒤 후기인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로 방향을 바꿨다. 특이하게 그는 서울대 입시를 준비하기 전에 육군사관학교도 잠시 다녔다. “서울대에 진학했다면 디자이너가 아닌 화가가 됐을 것”이라며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덕분에 디자이너로서 더 많은 영감과 도움을 받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후 3년간 프랑스 파리 퐁텐블로 아트스쿨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제일모직, 논노 등에서 일했다.


남성복을 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

스승인 배천범 교수께서 여성복은 포화상태니까 남성복을 해보라고 권했어. 말씀을 듣고 나니 어깨가 무거워지더라고. 선배가 전무하니까. 당시엔 ‘젠더리스’(성에 구애받지 않는)도 없고, ‘밀리터리’(군대식)도 없고 오로지 ‘~라사’로 대표되는 클래식한 아저씨 양복밖에 없었지.

남성복이 더 어렵지 않아?

솔직히 더 어려워. 활용할 소품과 디자인이 제한돼 있고, 성공하기도 쉽지 않아. 해가 더해갈수록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기 위해서라도 ‘옷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커졌지.

영감은 어디서 주로 얻어?

내가 경험한 것들, 봤던 영화들, 갔던 곳, 살면서 느낀 점 등에서 얻어. 그게 다 장광효 패션의 히스토리가 되는 거지. 예를 들어 이번 시즌의 키워드가 ‘제임스 딘’, ‘오드리 헵번’, ‘그레고리 펙’이라고 하면 내가 본 영화에서 영감을 얻은 거지. 내 앞에서 아른거리는 디자인이 여전히 차고 넘치니 다행이고, 지금은 옷을 만드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해.

장광효 컬렉션을 보면 색깔이 명확해. 어떤 디자이너들은 트렌드에 민감해 자기의 색깔을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시즌마다 키워드가 분명하거든. 첫 옷을 보자마자 ‘장광효네’ 감탄이 나와. ‘코리아’, ‘밀리터리’, ‘젠더리스’ 등 말이야. 이 세 가지는 언제부터 정립된 거야?

워낙 내가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에 관심도 많고, 자부심도 커. 조선시대 병풍이나 ‘백자 달항아리’(국보 제309호)만 보면 가슴이 떨리거든. ‘밀리터리’는 내가 실은 육군사관학교 다녔었어. 졸업 못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기도 했는데, 나하고는 영 안 맞았으니까. 나의 ‘베스트프렌드’는 다 장군이야.(웃음)

 

장광효는 패션디자이너로서 개인 창작 활동 외에 청와대 경호실, 국방부, 경찰, 한국공항공사, 신세계 이마트, 농협, 에스케이텔레콤 등의 정부기관과 기업의 유니폼을 제작한 이로도 유명하다. 그는 “내가 하는 일과 연결고리가 있는 다른 분야의 일을 하면 보람을 느낀다.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가능한 선에서 도움을 주고 싶다. 군복은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에, 10년 전쯤 국방부 장관에게 직접 메일을 써서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군복을 바꾸는 데 조언을 했다”고 말했다.

 

남성복에서 군복만큼 멋있는 것도 없어. 러시아 군복풍의 코트, 영국 군인의 트렌치코트 등 말이야. 근데 장광효 옷에는 이런 밀리터리와 로맨틱하고 여성스러운 코드가 접목돼 있어서 매력적이라는 거지. 그래서 여자 연예인들이 와서 자기 옷 만들어 달라고 사정을 한 거잖아?

김성령, ‘자우림’의 김윤아도 내 옷을 좋아하지. 최근에는 김영철, 하석진, 이상엽도 내 옷을 입었고.

1990~2000년대 연예인들은 거의 다 장광효 옷을 입었잖아? 조용필, 소방차, 이선희까지.

(3인조 댄스 그룹) 소방차의 승마 바지는 대단했지. 당시엔 헐렁한 스타일의 옷이 유행이긴 했어.

패션과 미술의 접목이라든가,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많이 하는 편인데?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가끔 리빙 페어 초대 작가도 해. 심사도 하지. 리빙과 패션의 만남이 좋아서야. 광주비엔날레에 참가도 했고, 자동차·음식·생리대는 물론 아디다스하고도 협업을 한 적이 있어. 요즘은 건축과 패션의 만남이 끌려.

재밌을 것 같아.

요즘은 인테리어, 공간 스타일리스트에 관심이 생기네. 패션디자이너는 공간, 무대미술, 조명, 음악 등에도 조예가 있어야 되겠더라고. 패션쇼 한번 하려면 여기에 모델 캐스팅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니까. 나도, 내 패션도 발전하고 있는 거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패션박물관을 만들고 싶어. 우리나라에는 내로라하는 많은 디자이너가 있는데, 옷을 보관하고 전시할 곳이 없어. 개인의 아카이브도 중요한데, 패션이 예술의 한 부분으로 각광받으려면 박물관이 꼭 필요할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내 주변을 바라보고 살피면서 살고 싶어. 내 재능을 기부도 하고. 2세가 없으니까 ‘장광효 컬렉션을 어떻게 해야 잘 마무리하는 걸까’ 고민도 하고 있지.

장광효 선에서 끝난다는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어.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이후 어떤 누군가가 장광효의 정신을 계승해 또 다른 패션의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봐.

정말, 그럴까?(미소)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81713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