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사태 때 목소리 높이고
법관대표회의에서 2년간 활동
페북, 방송에도 적극적 ‘신세대 판사’
만화가 되고 싶어 디자인학과 진학
재능 없어 포기…입사 면접 떨어져
부모님 권유로 사시 준비해 합격
“판사는 많은 환경적 혜택 받은 사람
자기 노력의 대가로만 보면 안돼
특권에 어울리는 책임의식 가져야
그 사실 깨닫도록 자꾸 간섭해주길”
류영재 춘천지법 판사는 “오랫동안 판사로 남고 싶어서 사법농단 진상 규명 활동에 적극 나서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지난 18일 춘천지법 앞에서 류 판사가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삼권분립에 대해서는 초등학생 때 배운 기억이 난다. 국가의 권력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라는 각각의 독립된 기관으로 나누어지며 서로 간의 견제를 통해 권력의 균형이라는 것이 지켜져나간다고 말이다. 시험을 위해 잠깐 머리에 힘을 주어 외우고는 평생 거의 생각할 일도 없었던 이 개념을 다시 어렴풋하게 떠올린 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라는 인물을 통해서였다. 대한민국 삼권분립의 부끄러운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한 이른바 ‘양승태 사법농단’ 사건을 지켜보면서 정작 내가 관심을 두게 된 이름은 양승태가 아니었다. 사실 권력의 맛에 사로잡혀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현 사회의 클리셰가 아닐까. 그들은 흔하고 뻔하고, 치미는 분노와 무관하게 지루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나는 다른 이름들에 눈길이 갔다. 법원행정처라는 출세가 보장된 사법부 내 기관에 사직서를 내고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알리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 이탄희 판사, 그리고 그와 함께 목소리를 높인 류영재 판사, 그리고 함께 연대했을 알려지지 않은 여러 이름들 말이다. 그중에서도 류영재(36) 판사에게 마음이 많이 갔다. 나와 비슷한 30대 여성이라는 점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고 법조인이 되기 전에 만화가의 꿈을 꾸고 미대를 졸업한 독특한 이력을 알게 되자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특히 그는 야구경기 시구(2013년 서울남부지법 근무 때)를 하고, 페이스북 활동이 활발하고, 시사예능 프로그램에 출연(지난 3월22일 한국방송 <거리의 만찬>)하는 등 판사 하면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권위적인 이미지와 많이 달라 보였다. 일종의 ‘신세대 판사’라고 할까.
지난 18일 근무시간이 끝나는 때에 맞춰 그가 일하는 춘천지방법원을 찾았다.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나눠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다소 긴장됐는데, 류영재 판사 역시 음악인을 만나는 경험은 ‘거리의 만찬’ 녹화를 같이한 자우림의 김윤아 다음으로 내가 두번째라며 조심스러워했다.
“판사가 3천명인데 왜 굳이 네가”
“제가 뮤지션의 세계를 잘 몰라요.”
―저도 판사들의 세계를 잘 모릅니다. 사실 오늘 준비한 첫 질문도 그래서 법원에서의 일상인걸요.(웃음) 오늘은 뭐 하며 보내셨어요?
“어제 좀 힘든 하루였어요. 전날 재판 준비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고 오전, 오후 내내 재판을 했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좀 늦게 8시쯤 일어났어요. 출근 전에 제가 키우는 앵무새 두마리가 다퉜는지 다리에 상처가 나서 약을 발라주느라 시간이 좀 지체됐어요.(웃음) 9시쯤 출근해서 커피를 한잔 내려 마시면서 워밍업을 했어요. 오늘의 일정 확인 같은 것도 하고. 오늘은 조정이 3건 있었어요. 오전에 1건, 오후에 2건.”
―조정이 뭔가요?
“법원의 판결 없이 두 당사자가 서로 양보하여 당사자의 합의로 분쟁을 해결하는 것을 조정이라고 해요. 저는 조정할 때 기본적으로 당사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보라고 해요. 오랫동안 여러 사건을 다루면서 알게 된 것은 똑같은 사실관계를 두고 양쪽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하지만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다만 해석이 서로 다르거나 생략되는 몇가지 부분이 있는 거죠. 양쪽 이야기를 다 듣느라 조정은 시간이 오래 걸려요.”
법원에서도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대법원. 그곳의 수장이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공사를 사익을 위해 사용했다. 여러 재판에 공정하지 못한 관여를 했고, 청와대와 거래를 했으며, 사법행정권을 남용했다. 그런 사실들이 이탄희 전 판사를 통해 처음 드러났다. 그는 2017년 2월 기획심의관 발령을 받고 법원행정처에 출근했다가 자신의 업무가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이튿날 사표를 내며 문제를 제기했고, 이는 법원행정처의 어두운 민낯을 드러내는 촉매제가 됐다. 류영재 판사 또한 그때부터 개인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페이스북 계정을 포함해 여러 신문 지면에 사법농단의 문제점을 알리고, 얼굴을 드러내며 언론 인터뷰를 했다. 또 사법농단을 계기로 2018년 4월 정식 기구가 된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춘천지법 대표판사로 2년간 활동해왔다.
―사법농단 사건 때문에 여러모로 힘드셨죠?
“사법농단은 판사들한테도 정말 큰 상처였어요. 어느 집단이든 권력지향적이고 사익을 추구한다고 해도 그래도 법원이 그중에 제일 낫다, 이런 생각들이 판사들 사이에 있고 서로에 대한 믿음도 있어요. 그런데 그 신뢰를 완전히 무너트리는 일이 터진 거죠. 그래서 저도 그렇고 다른 판사님들도 그렇고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이건 무조건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각자가 할 수 있는 목소리를 냈어요. 저 같은 경우는 그때 페이스북에 상황을 알리기 시작했고 그래서 언론에서 연락이 많이 왔어요. 인터뷰하기 시작하니까 저를 찾는 곳이 끝도 없더라고요.(웃음)”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했겠어요.
“부모님이 걱정 많이 하셨어요. 보수적인 대구 분들이시고, 저를 비판하는 언론을 많이 접하셨거든요. 판사가 3천명인데 굳이 네가 나서야겠냐는 말씀을 많이 하셨죠. 그런데 모두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말해주겠지’라고 생각하면 아무도 말을 못 해요.”
내가 잘 살기 위해 말한 것
―저도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데 늘 어떤 한계를 맞닥뜨리게 돼요. 제 정의감 속에서 항상 기회주의적인 비겁함을 봐요.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도 겁이 나서 입을 다물게 될 때도 되게 많고요.
“저도 그리 정의롭지 않아요. 우리 사회의 윤리나 도덕적인 잣대에 대해서도 항상 회의하는 편이고 대체 뭐가 정의인지도 모르겠어요. 저 역시 입 다물 때가 얼마나 많은데요.(웃음) 다만 어떤 일에서는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오는 것 같아요. 이건 너무나도 엄청나게 잘못된 일이라서 뭐라도 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되는 순간요. 그리고 이건 저를 위해서 한 행동이기도 해요.”
그는 ‘계산’을 했다고 했다. 목소리를 냈을 때의 상황과 안 냈을 때의 상황을 비교해서 어느 경우에 자신이 더 힘들지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를. 그렇게 낸 목소리라고 했다.
“보통 나서지 말라는 것은 판사로서 잘 살 수 있기 위해서인데, 만약에 제가 가만히 있어서 국민이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사법농단이) 어물쩍 넘어갔다면 저는 법원을 나왔을 거예요. 저는 오랫동안 판사로 남아 있고 싶거든요. 제 실익을 위해서 한 거예요. 자신이 얼마큼 뒷감당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비겁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그렇게 해야 나중에 보상심리가 안 생겨요.”
―사법농단 사건 때문에 판사들이나 재판에 대한 신뢰도 자체가 많이 낮아진 것 같아요.
“네, 확실하게 느껴져요. 지인인 변호사들이 가끔 자신들이 들어가는 재판의 공정성이 의심된다고 제게 하소연할 때도 있고, 또 패소 당사자들께서 불복하며 재판부를 믿을 수 없단 반응을 보이는 빈도도 늘어난 것 같아요. 나아가 정치권과 언론도 요즘은 재판 결과를 놓고 문재인 대통령의 압박에 굴복했다는 식으로 논평하기도 하고요. 전반적으로 재판을 왜 믿어야 하는가 의문을 제기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느끼게 됩니다.”
류 판사는 무엇보다 가장 속상한 것이 사법농단을 정치적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법농단이 처음 터진 것은 2017년 2월, 판사들이 내부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게 2017년 3월.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기 전이다.
“자꾸 이 문제를 정치적 이슈로 바라보면서 마치 문재인 대통령의 ‘지령’을 받아서 판사 일부가 적폐청산이라는 명목하에 권력교체를 꾀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말 황당해요. 재판 당사자들이 정치적 정체성을 부여해 저를 오해한다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하면 무척 괴로워요.”
―정치적 정체성을 덧씌우는 것이요?
“어느 쪽에서는 저를 정의롭다고 과대평가할 것이고, 다른 쪽에서는 저를 특정 정치성향의 판사라고 오해할 테니까요. 하지만 사법농단은 진보,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과 반헌법의 문제예요. 판사가 헌법과 반헌법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건 이상하지 않아요?”
―왜 헌법 대 반헌법의 문제라는 거죠?
“국회의원들과 접촉한 것, 청와대와 재판에 대해 상의한 것, 판사를 관료화시켜서 다른 조직과 협상시키고 그런 것들 다 위헌이죠. 삼권분립에 반하고 재판의 독립, 법관의 독립에 다 반하는 일이에요.”
지난 18일 퇴근 뒤 춘천지법 근처 카페에서 만난 류 판사 모습.
부모 반대 무릅쓰고 꿈 좇다가 ‘쫄망’
사법농단 이야기에 여전히 뜨겁게 목소리를 높이는 이 법관의 꿈이 사실은 아주 오랫동안 만화가였다는 것은 뜻밖이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줄곧 만화가의 꿈을 꾸었다고 했다. 만화가가 되기 위해 깊이 있는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대원외고에 진학했지만 본인이 생각했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그런 학교가 아니었다는 데 실망했단다.
“전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대학입시에 그다지 관심 없는 중학생 시절을 보냈거든요.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 애니메이션에 특화된 고등학교에 갈까 특목고를 갈까 하다가…. (대원외고가) 대입과 상관없이 좀 더 수준 높은 공부를 하는 곳인 줄 알았어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키팅 선생님 같은 사람과 공부하게 될 줄 알았던 거죠.”
고2 때부터는 미대에 진학할 준비를 했다고 한다. 만화가가 되려면 시각디자인과에 가라는 미술학원의 지도에 따라 그는 국민대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면서 만화도, 디자인도 포기하고 갑자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만화가를 꿈꾸고 디자인 전공을 하다가 중간에 재능 없음을 깨닫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그 포인트가 너무 뜬금없는 것 아닌가요?(웃음)
“만화는 대학교 2학년 때쯤 포기했어요. 그때가 우리나라 출판만화계 위기의 시절이었거든요. 이정애, 유시진, 김혜린 작가 등 존경하던 만화가 선생님들이 다 절필 선언 하고 그랬었어요. 디자인은 졸업 때까지 나름 열심히 해봤는데, 영 자질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저 스스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요. 졸업을 앞두고 마케팅 쪽으로 입사할까 했는데 대기업 면접에서도 떨어졌고요. 다들 이력이 특이하다, 대단하다 말하는데 이제 와서 그런 거지 그 당시에는 그냥 실패한 인생이었어요. 그때까지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내 맘대로 걸어왔는데 완전 쫄딱 망한 거죠. 그때 아버지가 사법시험을 제안하신 거예요. 딱 3년 지원해주겠다고. 그게 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죠. 근데 막상 해보니까 법 공부가 재미있던데요. 요조씨도 해보면 의외로 재미있어할걸요.”
―그럴 리가요. 대체 어떤 부분이 재미있었나요?
“법은 사람의 욕망을 다루죠. 민법 같은 경우는 돈을 둘러싼 욕망이라고 강하게 느껴져요. 개인적으론 돈이나 재화, 권리나 의무를 둘러싼 욕망이죠. 형법 같은 경우는 공동체에 피해를 끼치고 싶은 욕망과 그것을 제어하고 싶은 욕망이 부딪치는 거고요. 헌법은 더 큰 의미죠. 우리 공동체를 어떻게 설계해나갈 것인가의 얘기이고. 기본적으로 다루는 게 우리 사는 얘기예요. 당연히 논리적으로 완벽하지도 않고요.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 거죠. 저는 그런 게 너무 좋고 재미있는 거예요. 이토록 현실적인 것이. 그리고 또 좋았던 게 뭔 줄 아세요?”
―뭔데요?
“저는 법 공부 하기 전에는 처벌법만 있는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법이 되게 싫었어요. 왜냐하면 국가가 나를 혼내는 느낌이 들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들여다보면 법은 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것들이 더 많아요. 보호받으려면 법이랑 친해지는 게 중요해요. 법이라는 건 우리 공동체에서 나를 보호하면서 살기 위해 알아야 할 규칙 같은 거예요.”
―듣고 보니 확실히 법에 대한 공포가 좀 줄어드는 느낌이에요.
“법은 십계명이 아니에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계속 바꿔나갈 수 있어요. 악법도 법이니까 계속 지켜야 하는가, 법으로 존재하는 한 지켜야겠지만 불변의 법칙은 아니에요. 우리가 목소리를 내서 악법을 없앨 수 있어요. 우리가 지키기로 약속한 룰, 우리가 만든 룰. 딱 그 정도의 수준인 거예요.”
다양한 사람 만나려고 페이스북 시작
―이제 판사 몇년 차 되신 거죠?
“저 이제 9년 차 됐어요.”
―잘은 모르지만 법조계가 되게 보수적이고 고루할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그 세계 안에서 류영재라는 사람은 어떤 이미지인가요? 좀 괴짜처럼 볼 것 같기도 해요.
“문화 차이는 많이 느끼죠. 제가 다니던 대학교에서는 교수와 학생 사이에 위계질서가 없었어요. 친구처럼 지냈거든요. 그런데 이곳은 제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예의가 섬세하고 촘촘하게 있어요. 단적인 예로 우리는 점심의 자율이 없었어요. (재판장과 배석판사 2명이) 점심을 늘 같이 먹어야 하는 거예요. 저는 그게 좀 당황스러워서 2014년쯤에 점심 자율을 주장했어요. 그때 부장님들(부장판사=재판장)이 쇼크를 받으셨죠.”
―그래서 개선이 되었나요? 이제 점심 따로 먹어도 돼요?
“조금씩 개선이 되고 있어요. 이제 일주일에 한번은 따로 먹는 걸로 바뀌었어요. 제가 약간 여기에서 이질적인 느낌이 있죠. 아무래도 좀 튀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튀는 판결 하지 마라’고 했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기본적으로 판사들이 튀는 걸 안 좋아해요. 만약에 튀더라도 엘리트가 되고 인정받는 식으로 튀고 싶어 하지 부장님이랑 점심 같이 안 먹겠다고 튀고 싶어 하진 않아요.(웃음)”
―페이스북을 보니까 다양한 사안에 두루두루 관심이 많다는 게 바로 보였어요. 애초에 페이스북을 시작한 것도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서였다고요?
“네. 주변을 돌아보니까 제가 만나는 사람 중 95%가 법조인이더라고요. 되게 동질적인 사람들만 만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겁이 좀 나더라고요. 내가 계속 판사들만 만나면 내 생각이 우리 사회의 일반 상식하고 통할까, 혹시 유리되지는 않을까. 그래서 페이스북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때가 2015년께였는데 한참 페미니즘이라든지 그런 이슈들이 확 나왔을 때였어요. 정말 새로웠어요. 법원 판사들이 아무도 안 하는 얘기를 여기에서는 엄청 많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많이 배웠어요.”
―지금도 여기저기서 좋은 기사나 글들을 열심히 공유하시고 챙겨보시던데요.
“법조인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판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이 정말 많이 와요. 그런데 만약 제가 그 사건의 함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재판을 하게 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혐오표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요, 아직 우리나라에는 혐오표현을 다스릴 수 있는 법이 없어요. 그래서 모욕이나 명예훼손으로 걸고 들어가죠. 그런데 혐오표현이랑 명예훼손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혐오표현의 기본은 차별이에요. 예컨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이다라고 하면, 특정 인물을 향하더라도 그것이 기본적으로 성소수자 집단 자체에 대한 차별을 깔고 있는 거예요. 혐오표현으로 피해를 본 성소수자가 현행법상 어쩔 수 없이 모욕이나 명예훼손에 관한 법을 통해 보호를 요청하더라도 그들이 바라는 것은 혐오표현의 해악을 제대로 봐주는 것일 거예요. 그런데 판사들은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혐오표현이 법적 개념으로 안 들어와 있으니까 함의를 읽기가 쉽지 않은 거죠. 그래서 그냥 한 개인의 명예가 얼마나 훼손됐냐로만 판단하기 쉽고 그렇게 되면 사회와 재판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을 거예요. 사회 각층의 목소리에 골고루 귀를 기울여서 겉으로 드러난 문제뿐만 아니라 함의까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법조인들이 노력을 많이 해야죠.”
지난 18일 근무지인 춘천지방법원 건물 앞에 서 있는 류 판사.
판사들 더 과감해야 하지 않나
―요즘에 특별히 많이 하는 생각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우리가 왜 ‘고위’ 공무원인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판사는 임용 때 3급으로 시작한다) 판사만큼 신분보장이 확실한 직업이 있을까요? 이번 사법농단 저지른 사람들의 최대 징계가 정직 6개월밖에 안 되잖아요. 우리만큼 생계를 보장받는 사람들이 더 헌법적 책무를 지키기 위해 과감해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을 느껴요. 파업하시는 분들, 미투운동 하시는 분들은 자기의 모든 걸 걸고 하세요. 진짜 약자의 자리에서도 하시잖아요. 해고당하고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상황 속에서도 한다고요. 우리는 왜 그렇게 치열하지 못할까. 이렇게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약할까. 우리는 특권을 부여받았다는 걸 인정하고 이 특권에 어울리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해요.”
―언론 인터뷰와 글을 보면 국민의 관심을 갈망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그냥 재판의 결과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사법부 운용에 대해 계속 의심하고 지켜봐주기를 원하는 건가요?
“사법농단을 겪으면서도 느낀 건데 존경할 만한 판사들이 많아요. 그런데 전체적으로 놓고 봤을 때 우리 사법시스템은 정말 견제를 안 당해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재판을 믿어야 한다’ ‘어려운 시험 합격한 대단한 사람들인데 어련히 잘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하지만 재판이 신탁도 아니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판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많은 환경적인 혜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에요. 우리 사회에서 나름 성공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알았으면 해요. 본인이 가진 특권이 내 노력의 보상이나 대가라고 생각하고 누려왔다면, 이제는 그게 아니라 우리가 왜 이런 특권을 부여받았는지 이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깨달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이걸 스스로 노력해서 깨닫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서로 온정주의적이 되기 쉬우니까요. 결국은 외부에서 국민이 자꾸 간섭하고 태클을 걸어야 해요. 사법농단은 사실 오래 지속된 무관심의 틈에서 발생한 거라고 봅니다.”
인터뷰하기 위해 켜놨던 녹음기를 끄고도 우리는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다. “저희끼리는 메일을 보낼 때도요, 꼭 존경하는 판사님이라고 ‘존경하는’을 붙여야 한다니까요.” 법조인의 소소한 일상을 알려주며 그는 장난처럼 투덜거렸다. 판사로도, 내 또래 여성으로도 ‘존경하는’이라는 수사가 어울려 보인다고 말하자, 그는 거듭 아니라고 했다. 그 모습이 아주 유연하고 자연스러워 겸손을 오래 만져온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얼마 전부터 류영재 판사는 <한겨레>에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첫번째 칼럼 제목은 ‘재판을 왜 믿어야 하는가’였다. 거기서 그는 판사라는 사람들의 나약함, 완벽하지 않음을 고백했다. 우리는 신이 아니라고. 그러므로 한계가 존재한다고.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지 고민하겠다고 다짐하는 그 칼럼의 마지막 문장은 ‘동행해달라’였다. 자신이 머무는 세계에 진심을 다한 ‘존경’이 왕래하기 위해 류영재 판사는 계속 우리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9174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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