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최고 외국어 공부법은 번역이다 / 김재준(경제학과) 교수

국제회의에 가보면 한국인과 일본인이 영어를 가장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신세대는 기성세대보다 외국인과 영어로 소통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적다. 하지만 회화를 잘하는 것이 외국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언어 능력은 책 등 텍스트를 빨리 정확하게 읽는 것이다. 인공지능(AI) 시대에 독해 능력은 더 중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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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 무서운 한국인


한국인은 오랜 기간 영어를 배운다. 요즘은 이중언어 구사에 대한 기대로 이제 막 말을 시작한 자녀에게 한글과 알파벳을 동시에 익히게도 한다. 대학생의 어학연수는 거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고, 해외여행이 보편화돼 성인의 영어 학습 열기도 식지 않고 있다.


이처럼 오랫동안 공부하는데도 왜 한국인은 영어를 자신 있게 하지 못할까. 거리에서 외국인이 혹시 뭔가를 물어볼까 싶어 시선을 피하거나 고개를 숙인 경험이 없는가. 어쩌다 외국인과 대화해도 국적이나 날씨 외에 나눌 말이 생각나지 않았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왜 서양철학 책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될까”라는 고민을 했다. 애당초 철학 자체가 어렵다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한국인의 언어 감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 언어에 대한 감각이 없다.


다시 질문해본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배웠는데도 영어를 못할까. 정답은 ‘영어만’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영어에 대한 실용적 욕망에 사로잡힌 탓이다.


한국인이 영어를 못하는 이유는 ‘언어 감각’을 키우지 못해서다.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을 보면 논리적이면서도 유창하게 말한다. 반면 한국인은 영어의 기능적 측면에만 주목한다. 오로지 학교 성적과 입시를 위해 영어를 공부한 탓에 언어 감각을 키울 필요도, 여유도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언어 감각을 키울 수 있을까. 필자는 외국어를 ‘번역’하는 훈련이 그 방법이라고 믿는다. 필자는 여러 인문학 공동체에서 번역 세미나를 주관했다. 번역 프로세스를 알아야 한국어로 번역된 인문학 책도 더 정확하고 편하게 읽을 수 있다. 게다가 번역을 통해 언어 감각을 키우면 낯선 외국어를 배우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책은 원전으로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독자가 여러 언어에 통달할 수는 없다. 이 방법은 어떨까. 우선 원전을 가장 충실하게 번역한 번역본을 고른다. 천병희 역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대표적 예다. 이후 고대 그리스어를 읽는 법과 기초 문법을 공부한다. 번역본을 읽다가 좋아했던 부분이나 의미가 잘 통하지 않았던 부분을 다시 원서에서 찾아 읽어보자. 이렇게만 해도 번역본을 읽으면서도 원서가 가진 느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영어 원문을 프랑스어나 독어 등 다른 외국어로 번역한 것과 비교해보면 언어마다 한 텍스트에서 읽어내는 영역과 강조하는 부분이 모두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동일한 텍스트를 서로 다른 언어들과 비교해 번역하는 과정을 통해 언어 감각은 점점 더 섬세해진다.


문학 작품을 좋아한다면 더욱더 외국어를 공부하자. 가능하면 배울 수 있는 만큼 많이 배우는 것이 좋다. 원어민과 대화하기, 원서를 모국어처럼 독파하기 등 헛된 꿈을 포기하고 아주 소박한 욕심을 추구해보자. 해당 언어의 발음과 기본 문법을 공부하고, 단어 1000~2000개를 외우는 식이다. 앞서 언급한 번역 프로세스를 적용해 원서와 번역본도 함께 읽어보자. 외국어 번역본들을 동시에 펼쳐놓고 마음에 드는 장면이나 문장을 비교해가며 읽으면 좋다. 이 훈련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날 언어 감각이 살아났다는 것이 느껴진다. 외국어뿐 아니라 모국어로 상황을 포착하고 반응하며 묘사하는 감각까지 살아나게 된다.


좋은 번역은 무엇일까

 

 


영미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첫 문장은 한국에서 다양하게 번역됐다.

 


흔히 문학에는 정답이 없으니 모든 번역이 좋고, 취향 문제라고 생각한다. 직역과 의역 중 무엇이 좋을까. 독자를 배려한 읽기 쉬운 번역은 과연 좋은 선택일까. 실험적인 번역과 명백한 오역의 차이는 무엇일까. 번역하면서 이 같은 질문들을 던지고 고민해보는 것도 언어 감각을 키워준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번역자의 과제는 낯선 원작의 언어 마력에 걸려 꼼짝 못 하고 있는 순수 언어를 번역자 자신의 언어를 통해 해방시키고, 작품 속에 갇혀 있는 언어를 그 작품의 재창작을 통해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베냐민은 번역이 ‘또 하나의 창작’이라고 얘기하는 것일까. 베냐민이 말하는 번역자의 과제는 독자에게 낯선 언어로 된 하나의 작품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번역을 통해 모국어를 낯설게 함으로써 그 경계를 확장하고 원작의 의미에 숨어 있는 ‘순수 언어’를 해방시켜 진리의 언어를 드러내는 것이다. 번역 훈련을 하면 외국어뿐 아니라 모국어에 대한 감각까지 섬세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베냐민의 말대로라면 번역은 원작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이다. 그것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언어 감각을 한층 더 날카롭게 다듬어준다. 일본 근대화는 번역에서 시작됐다. 번역은 창작만큼 가치 있는 작업이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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