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2012년이 훌쩍 지나가고 2013년 새해가 밝았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국민*인들은 새해에 야심차게 세워놓은 계획을 어느 정도 이루어 냈는가. 혹시 계획을 실천하기는커녕 방황만 하다 어느새 새해를 맏이 한 건 아닌지. 만일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차분히 자리에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일 년 무엇으로 채울지 생각해 보자. 이에 도움을 주기 위해 나노전자물리학과 장지훈 교수님과 차분히 인생에 대해서, 청춘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어 보았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Q. 교수님의 과거로 돌아가서 대학시절에 대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나노 전자 물리학과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교수님께서 했던 전공은 무엇이었는지요?
저는 학부시절 물리학을 전공했고, 전자공학을 부전공 했습니다. 석사과정에서는 핵물리실험을 공부했고요. 핵자기공명법 연구로 박사를 받았습니다. 다른 교수님의 경우 대부분 물리라는 한 우물만 판 경우가 많은데, 저 같은 경우 학부시절 전자공학을 공부해봤다는데서 다른 점이 있죠. 그렇다고 물리학이 잘 안 맞아서 한 눈을 팔았다기 보다 전자공학도 재밌고 물리학도 재밌어서 둘 다 공부하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두 공부가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서 더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Q. 교수님께도 대학 시절 기억에 남는 교수님이 계신가요?
가장 기억에 남는 교수님은 박사 지도교수님이세요. 저는 박사학위 공부를 미국에서 했는데, 그곳에서 이탈리아 교수님이 제 지도교수님이 되셨습니다. 원래 미국에서는 교수 한명과 학생 5명 정도가 같이 공부를 하는데, 제 지도교수님께서는 학생을 많이 받지 않으셔서 저 혼자서 약 2년 반을 과외 식으로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 보니 교수님이시기도 했지만, 가족 같았어요. 도움을 많이 받았고, 또 도움을 드리기도 했죠. 그 시절에 옥수수를 먹다가 이빨에 낀 적이 있는데, 잇몸이 심하게 부어서 말을 못할 지경이었어요. 미국에서 외국인이 의료서비스를 받으려면 큰 돈이 들었기 때문에 병원도 못가고 있었죠. 그때 교수님이 너 영어발음이 좀 이상하다며 추궁하셔서 글로 저 잇몸이 부어서 그런다고 조금 있으면 괜찮아 질 거라고 말하려는데 괜찮아 질 거라는 말을 듣지도 않고 당장 데리고 병원에 데려가서 본인 이름으로 치료를 받게 하셨었어요.
이 외에도 제가 실험도중 실험기구를 잘못 만져 연구실이 온통 연기로 가득 찬 일이 있었는데, 천장에 있는 실험기구의 뚜껑을 닫지 않으면 더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누군가 닫아야 했고 제가 올라갔는데, 교수님께서 그 실험기구 그냥 버리자고 당장 내려오라고 소리치셨죠. 그 때 그 실험기구가 약 2~3억 정도 했었구요. 뚜껑을 닫고 내려오려는데 현기증이 나서 떨어졌고 교수님이 밑에서 저를 고스란히 받아주셨어요. 덕분에 저는 아무 곳도 다치지 않았지만, 교수님은 갈비뼈에 금이 갔죠. 이 외에도 너무 고마운 일이 많고, 인간적으로 정말 잘해주셨어요. 지금도 연락을 많이 하고 있고요.(웃음)
Q.얼마전 학교에서 가을 축제가 있었는데요 교수님께서 대학재학시절 축제는 지금과는 좀 달랐을 것 같아 궁금합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제 학부시절은 86,87,88,89년 이었어요. 이때 잘 아시겠지만, 민주항쟁이 한창이 때였죠. 특히 87년도에는 6.10 항쟁으로 인해 수업 밖에 있었던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네요.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축제 또한 이러한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데모를 많이 했죠. 음.... 그 외에는 축제때 제가 햄 이라는 아마추어무선클럽의 회원이었는데, IBM XT 피씨로 동아리 홍보영상을 만들었던 것이 기억에 많이 남네요. 축제 때 틀었었는데, 동영상이 보급되기 전이라 많은 주목을 끌었었죠. 그 외에는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나가서 노는 것 보다도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축제라고 해서 딱히 기억에 남는 일은 없네요~
Q.교수님이라는 진로를 결정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있으셨나요?
1997년 IMF가 터지고 한창 경제가 어려울 때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사실 연구소에서 일을 할 생각이었는데, IMF로 인해 연구인력이 많이 정리해고 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연구소에서 일하는건 힘들 것 같았어요. 유학중이었기 때문에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죠. 그러던 중, 학부시절 공부해 두었던 전자공학을 활용해 실리콘 밸리에 취직을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 길로 실리콘밸리의 실리콘이미지 라는 벤처기업에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리콘 이미지라는 회사는 반도체소자에 들어가는 DVI칩을 처음으로 개발한 회사에요. 저 또한 이 개발에 참여 했었죠. 여기서 정신없이 일을 하다보니 문득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회사일이 정말 정신없이 바빴고, 회사에서 원하는 일만을 해야했기에 제가 하고 싶은 연구는 뒷전이었어요. 4년 정도 일을 했는데, 2년 정도는 계속해서 물리공부를 다시 하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온 것 같아요. 그러던 중 국민대학교에서 낸 교수모집 공고를 보고 2003년도에 국민대학교에 부임하였습니다.
Q.요즘은 대학생들도 직장인 못지않게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데요. 추천해주고 싶은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다면요?
저는 무언가를 만들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요. 혹시 프라모델을 아나요? 전 그걸 하나하나 조립하는게 취미에요. 색칠도 직접하면서요. 요즘은 시간이 없어서 잘못하긴 하지만요. 7년전에 산 모델을 아직도 만지고 있거든요.이렇게 시간이 없을 때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요. 지금도 듣고 있듯이 하루종일 음악을 틀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운동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 것을 권유하고 싶네요. 사람마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다를 순 있지만, 아무래도 육체적 활동을 하면 누구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아요.
Q.교수님께서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일들을 가장 먼저 하고 싶으세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공부를 더 충실히 해보고 싶어요. 사람마다 만족도가 있는 거잖아요. 저는 제가 만족할 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 같아서 가장 아쉽습니다. 연애를 좀 더 일찍 해봤어도 좋았겠다 는 생각도 들어요. 남자와 여자는 다른 부분이 참 많잖아요? 그런 부분들을 경험을 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참 힘든 경우가 많더라고요. 때문에 좀 더 일찍 조금 더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았다면, 더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Q.마지막으로 20대의 국민*인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 있으신가요?
한 세 가지 정도를 얘기 하고 싶어요.
첫째, 사람이 나이가 들면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무엇을 하든지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둘째, 해 놓은 게 있으면 뭐든지 나중에 도움이 된다는 것. 여기서 해놓은 것이라는 것은, 정말 열심히 제대로 해놓은 것을 말해요.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거나 설렁설렁 하는 것은 의미가 없죠.
셋째, 정신이 실체를 한계 짓는다는 것. 대부분이 하려고 하면 다 되요. 물론, 남자가 임신을
한다든지 하는 운명적으로 할 수 없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일들이 못할 건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요즘 청년들이 해보지도 않고 '나는 안
돼'라고 말하며 포기하는 것을 보면 정말 안타까워요.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또 그렇게 생각 하기 전에 내가
정말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네요. 진심으로 하려고 해봤는지. 일단 '해보자'라고 생각해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거예요.
교수님께서 하려고 해봤냐고 묻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과연 나는 진심으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했던 적이 있는가. 그저 남들이 하는 만큼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만큼만 따라가기에 바빴었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 남들만큼만 꿈꾸며 딱 그 정도에서 더 이상 발전이 없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국민*인들은 과연 무언가를 진심으로 해보려 했던 적이 있는가. 만일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면 지금부터 라도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서 무엇이든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