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FF Magazine] 문화의 새로운 출발점, 픽시 필드로의 라이딩


각양각색의 자전거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 일대를 중심으로 자전거 도로가 확충되고, 철도와 지하철에 자전거 전용 칸이 생기는 등 정책적인 변화도 물론 무시할 수 없지만, 이렇게 인프라가 조성되기 전부터 자전거의 인기는 이미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MTB, 미니벨로, 씨디바이크, BMX, 리컴번트 등 다양한 디자인과 용도의 자전거들이 ‘한강 자전거도로’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와 맞물려 일산호수공원이나 여의도공원에서 보았던 ‘대여 자전거점’을 찾는 사람들은 이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제 자전거는 ‘강변공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주택가 골목에서 도로로, 번화가로 진출하며 거리의 컬러를 다채롭게 만들고 있다. 이 변화를 이끈 주역은 따로 있다. 약 2~3년 전부터 미국, 일본 등으로부터 국내에 도입되어 스트리트 문화를 이끄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픽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초창기에는 그저 소수의 트렌드 리더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픽시 라이프’는 20~30대의 젊은이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갔고, 이제 “나도 픽시를 갖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쉽게 접할 수 있을 정도로 픽시는 영향력 있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다.
픽시는 ‘픽스드 기어 바이크(Fixed Gear Bike)’를 부르기 편하게 줄인 일종의 애칭이다. 기어가 없었던 시절의 싱글 기어 자전거를 그대로 따른 형태로 경륜용 자전거와 가장 흡사한 포메이션이다. 기어가 없고 뒷바퀴와 체인이 고정된 형태이기 때문에 보통의 자전거와는 달리 페달을 앞으로 밟으면 앞으로 나가고, 뒤로 밟으면 뒤로 나간다. 브레이크도 없기 때문에 주행을 멈추려면 주행 방향과 반대로 페달을 밟아야 한다. 심지어 언덕을 내려갈 때도 다리를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된다. 결국 픽시를 타려면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야 하는 것이다. 다루기 힘든 이런 원시적인 형태의 자전거에 한국, 아니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픽시는 1990년대 초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의 ‘바이크 메신저(Bike Messenger : 우리나라의 퀵서비스 같은 것으로 자전거로 서류나 작은 물건들을 나르는 서비스)’ 신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굉장히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어 일반적인 자전거를 타는 메신저들과 비교해 몇 배 이상의 효율을 낼 수 있었고, 배달하는 도중에 자전거가 고장 나도 몇 개의 기본적인 공구만으로 간단히 수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메신저들의 전유물이던 픽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일반 대중들의 인기를 끌며 보급되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엉켜있는 맨해튼 거리의 차들 사이를 조롱하듯, 빠르고 유연하게 뚫고 나가는 픽시 관련 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유럽, 일본 등지에도 픽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픽시가 등장한 건 대략 2008년 초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국내의 픽시 라이더는 1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따라서 픽시를 조립할 수 있는 부품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웠다. 운이 좋은 경우엔 국내 경륜용 자전거 부품의 ‘창고 대방출’ 행사 등을 통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픽시를 만들 수 있었지만 보통 이베이나 일본 옥션 등을 통해 부품을 구입해야 했다. 픽시 인구가 서서히 늘어나고 있었지만 그 수요를 채워줄 시장은 척박한 상태가 지속됐다. 픽시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드디어 첫 픽시 전문샵이 등장한 건 2008년 5월경이었다. 압구정과 홍대 일대 등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를 중심으로 픽시샵들이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불과 2년 사이에 변화가 일어났다. ‘픽시의 천국’이라고 말하기까지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2008년 초에 비해서는 천국이라는 표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제 픽시를 접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현재 국내 픽시 시장은 다양한 해외 브랜드들이 점령하고 있다. 각 브랜드들마다 특성이 달라 나만의 픽시를 위한 선택 범위는 무궁무진하다. 그렇다보니 픽시를 보다 현명하게 구입하려면 많은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픽시 태동기에는 웹 커뮤니티에 가입해 도움을 요청하거나, 외국 사이트를 뒤져 영어를 공부해 가며 정보를 찾았다. 그도 안 되면 인맥을 총동원해 소개에 소개를 받아 픽시를 알아 가야 했다. 전문샵의 등장은 그런 수고를 덜어주고 있다. 이제는 구매하고자 하는 이들의 기호를 충족시킬 만한 아이템들이 전문샵에 많이 갖추어져 있다. 픽시를 소유하고 싶은 사람들은 샵들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자전거를 주문하거나 구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픽시 전문샵이 단지 부품이나 완제품 등을 판매하는 역할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전문샵은 픽시와 관련한 패션, 가방, 모자 등의 소품 등을 소개하며 ‘픽시 라이더 스타일’을 리드하기도 한다. 또 픽시를 매개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다양한 자료(웹사이트, 영상, 잡지 등)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며 국내 픽시 문화 정착에 기여하는 것도 샵의 역할이다.
한국에서 픽시 라이프를 즐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해 보다 심층적으로 알아보고자 서울 시내의 대표적인 픽시 전문샵을 찾았다. 합정동의 ‘DICE’, 신사동 가로수길에 위치한 ‘MOST SEOUL’, 서교동의
‘3.57’에서 각각 픽시 문화를 이끄는 이들을 만나 현재 한국 픽시 필드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았다.
 
픽시 때문에 샵을 찾는 분들은 주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연령대가 많은데 요즘엔 고등학생, 40대까지 연령층이 확대되었습니다. 손님들의 구매 경향을 보면 현재 픽시는 개성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 같아요. 이렇게 픽시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분들을 보면 안타깝죠. 보통 픽시가 브레이크가 없는 자전거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입니다. 브레이크가 있으면 심플함이 덜하기 때문에 단지 ‘스타일’을 위해서 떼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권하고 싶지 않아요. 현재 서울에선 브레이크가 없는 픽시를 출고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리고 픽시를 타는 분들은 스타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안전보다 ‘멋’에 중점을 두기도 하는데, 보호 장비는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반드시 보호 장비를 착용해야 합니다.
지금의 자전거는 장난감과 같은 놀이기구의 개념이자 이동수단이고 운동기구입니다. 하지만 픽시뿐 아니라 도로 위의 자전거는 다 위험합니다. 화려한 모습으로 타야만 멋있는 게 아니라 안전하게, 주어진 장소에서 타는 것이 진짜 멋진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픽시의 전파자로서 픽시만이 아닌 자전거 전체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미니벨로처럼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자전거의 시장도 조사해 개선점을 찾아 보완하고 더 나은 자전거를 만들고 싶습니다.
 
 
국내는 해외와 달리 자전거 시장의 역사가 짧습니다. 우선 자동차가 먼저 들어왔기 때문에 자전거에 대한 문화적 인식이나 배려가 거의 전무해 제도적 뒷받침이 시급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자전거를 타기에 아직 열악한 환경적 조건을 가지고 있어요. 사실 한강 자전거 도로 말고는 마음 놓고 탈 수 있는 곳이 없거든요. 자전거 도로 같은 것을 만들어도 많은 경우 주차장이나 인도로 사용돼서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자전거를 위한’ 길이라고 하기엔 힘들죠. 하지만 자전거 인구와 수요는 점점 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질적으로 자동차를 대신할 수단은 자전거거든요. 요즘 ‘자출족’들이 늘어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시간이 지나 기술이 발달하면 픽시처럼 클래식한 형태의 자전거 말고, ‘e-bike’처럼 하이브리드한 자전거도 보급될 것이고요. 그런 생각들을 한다면 자전거 시장에 대한 전망은 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냉정하게 보면 픽시는 소수 문화로 남게 될지도 모르죠. 브레이크 문제와 경사로 문제 때문에 불편함이 있거든요. 그렇게 타기 힘든 자전거지만 외양이 예쁘고 멋있기 때문에 현재는 인기가 많습니다. 그 어느 자전거보다도 안전 장비가 필수인 픽시를 타면서 종종 무모하게 차도로 뛰어드는 라이더들도 많아요. 스타일을 넘어 교통수단이라는 맥락에서 봤을 때 픽시 라이더들은 절대 약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라이트, 헬멧, 신호 벨 등의 안전 장비를 모두 갖춰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픽시 제작에 있어서 아직까지는 국내 브랜드로부터의 수급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해외 온라인 경매 등을 통해 직접 부품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무작정 가격 면에서 저렴한 것을 구입하면 그만큼 사고의 위험이 큽니다. 소비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제지할 수는 없지만 안전을 생각한다면 픽시 라이더들이 조금은 깊이 생각하고 구매했으면 좋겠어요.
가까운 일본의 경우, 픽시 문화가 우리나라보다 많이 앞서 있습니다. 자전거가 생활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문화가 자리 잡힌 곳이라 픽시의 인지도도 높습니다. 그에 비해 국내 시장은 저변이 열악하죠. 그런데 이 부분은 순식간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 같은 경우도 10~20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통해 라이더들 스스로 문화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지금 같은 안정기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하나하나씩 환경이나 문화, 사고방식을 바꿔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픽시 시장은 더 커질 수도 더 작아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현 상태를 유지할 수도 있고요. 아무도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죠. ‘픽시 라이프’가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기를 바란다면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지속적으로 라이더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마케팅 전략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전거를 타기에 충분한 환경이 정책적인 차원에서 조성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그렇게 순차적으로 진행된다면 우리나라의 픽시 문화도 틀림없이 긍정적인 쪽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자전거로서, 그리고 스타일로서 픽시는 이제 막 주목 받고 자리 잡기 시작했다. 거대한 자전거 산업에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지만 픽시가 특별히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는 건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다. 앞으로 더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한 아이템이자 어느 사이엔가 우리 생활 가까이에 파고 들어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개성 강한 자전거, 픽시’. 자전거 문화의 후발대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시장에서 픽시가 살아남아 보다 뚜렷한 문화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선 더욱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앞서 만나본 픽시 컬처 리더들의 말처럼 자전거를 배려하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와 더불어 공간 확보와 법 제정 등의 제도적인 확충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라이더가 스스로 지키는 안전문화 정착’이 아닐까. 아무리 스타일리시하고 트렌디한 현상이라도 사회질서와 개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문화라면 의미 없을 것이다. 자전거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픽시 컬처’가 발전하길 기대하면서 픽시 필드 여행의 브레이크를 부드럽게 걸어본다.
DICE는 리더바이크, 루너펜을 독점 수입하고 있다. 국내 첫 총판으로 초창기에 형성된 세 군데의 샵 중 하나로 초기에는 샵이 아니라 쇼룸에 가까운 사무실이었는데 한강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 라이더들이 자주 찾다보니 현재의 로드샵 형태가 되었다. 1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픽시라이더들과 교류하며 픽시 문화를 바로 전파하자는 DICE의 초심을 실현해나가고 있다.

LEADER BIKE 수입총판 : http://leaderbike.co.kr
MOST SEOUL은 주로 영국의 ‘Charge Bikes’를 주로 취급한다. ‘Charge Bikes’는 화려한 것보다는 심플한 것을 추구하는 브랜드로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인지도가 높은 데 반해 한국에선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그래도 픽시를 좀 아는 사람 사이에서는 유명하다. 타 브랜드에 비해 가격대가 저렴한 편이고, 심플함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다. 과도기의 한국 자전거 문화 속에서 샵이라는 공간을 통해 ‘배려’의 마인드를 전파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MOST BIKE : http://www.imost.co.kr
3.57이란 이름의 경륜팀과 함께하는 픽시전문샵이다. 경륜팀 ‘3.57’은 전문선수가 아닌 일반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경륜팀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샵에서 판매되는 제품들은 주로 공방을 통해 맞춤 제작을 하고 있다. 외국에서 부품을 수입해 장인들을 통해 조립하는 형식으로 제작되는 ‘3.57’의 픽시는 완성도가 높다. 일회성의 유행이 아닌 진짜 문화로 픽시라이프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나아가고자 한다.
글 / 신영화(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