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 자국을 남기지 않는 가상의 밧줄, 절벽에서 잘 미끌어지는 장난감 신발, 예쁜 혈흔을 남겨주는 조악한 커터칼…. 관람객 서아무개(21)씨는 지난 20일 10㎟(3평) 내외의 작은 전시공간 ‘자살공화국’을 구경하고 기괴한 ‘자살 도구’들을 쇼핑했다. 전시된 태블릿 피시로 자신이 원하는 자살법을 맞춤 상담 받기도 했다.
서울 마포구 상수동의 한 갤러리에서 ‘자살공화국 명품관 그랜드오픈전’이란 이름의 기이한 전시회가 지난 19일부터 열리고 있다. 다섯 걸음 남짓 작은 공간에 ‘자살을 합법화한 나라’라는 설정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구현했다. 자살신고서와 약간의 세금을 내면 지정된 장소에서 합법적으로 자살할 수 있다는 ‘발칙한 상상’이 담긴 가상의 공간이다.
이 전시회는 디자인을 전공하는 20대 청년이 오이시디(OECD)국가 중 자살률 최상위권인 한국 사회를 되돌아보자며 기획했다. 오민근(23) 디자이너(국민대 시각디자인 전공)는 ‘만약 자살을 합법화한 나라가 있다면 어떨까’라는 예술적 설정을 통해 자살에 둔감한 한국사회에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오 디자이너는 “뉴스에선 ‘창조경제’, ‘청년창업’같은 희망적인 말이 나오는데, 제 주변 친구들은 왜 계속 힘들까, 대체 왜 젊은이들이 극단적 선택할까 의문이 들었어요. 제가 공부하는 디자인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고민해보고 싶었어요”라며 전시회 취지를 설명했다.
오 디자이너는 아이디어에만 머물지 않고 같은 대학 동료 4명과 아르바이트로 200만원을 마련했다. 각자 한국에서 느낀 현실을 풍자한 소규모 전시를 기획해 <집업 더 버튼>이란 종합 전시회를 열었다. ‘자살공화국’도 그 중 하나다. 오 디자이너는 이곳에 미술 소품들, ‘살자(殺字)’캘리그라피, 직접 쓴 <자살공화국> 단편소설 등을 전시했다. 28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회는 25일까지 250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20일 이 전시회를 관람한 대학생 조아무개(21)씨는 “작품에 과장과 해학이 있는데도 현실성이 녹아 있다. 죽음까지 남들에게 과시하려 명품도구를 활용하는 이 공화국이 우리나라의 현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했다. 미술평론가 김준기씨는 “점점 살기 힘든 사회가 되어가는 한국에서 예술가들이 작품활동을 통해 ‘우리 이렇게 사회문제에 무관심하게 살아도 되는 겁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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