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 골목에서 유일하게 얌전하게 산다”고 주장하는 디자이너 장광효의 쇼룸은 정작 색(色)과 기(氣)로 가득하다.
그는 “평소 못 풀고 사는 에너지는 온통 디자인과 인테리어에 쏟아 넣어서 그렇다”면서 카메라 앞에서 도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표정 좋다”고 사진 기자가 말하자 이번에는 씩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나, 시트콤 출연했던 사람이잖아.”
한때 그가 만드는 옷은 불량품조차 팔려 나갔다. 실수로 왼쪽과 오른쪽 소매를 바꿔 달아놓은 옷이었다. 사람들은 "역시 파리에서 쇼 하다 온 디자이너가 만든 옷이라 아방가르드한 것이 영 다르네"라고 했다. 조용필이 그의 옷가게에 직접 와서 옷을 골랐고 김건모·신승훈 같은 톱가수들은 아예 그의 가게에서 살다시피 했다. 소방차부터 서태지와 아이들, 현빈, 김영광까지 30년간 남자 연예인 다수가 그의 옷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은 남성복 브랜드 '카루소(Caruso)' 디자이너 장광효(61) 얘기다.
1987년 서울 갤러리아 백화점 맞은편에 문을 연 그의 작은 가게는 시작부터 입소문이 돌았다. 첫 달 매출이 640만원, 그다음 달 매출이 1200만원…. 매달 그렇게 이전 달보다 두 배씩 더 벌어들이나 싶더니 2년 뒤엔 연 매출 30억원을 찍었다. 1990년대 중반 무렵, 매장은 어느덧 30여 개로 불어났다. 1994년~96년엔 우리나라 처음으로 파리 남성복 컬렉션 무대에 섰다. 그렇게 오르막길만 펼쳐지는가 싶었다. 1996년 장광효는 회사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파리 쇼와 서울 쇼를 바삐 오가며 매장 운영은 직원에게 맡겨놓고 살 때였다. 돈이 줄줄 새고 있었다. 믿었던 직원들은 원단과 옷을 빼돌렸고, 장부는 엉망이 돼 있었다. 그는 결국 매장 세 개만 남기고 다른 매장들을 접었다. 반지하 작업실에 들어가서 2년 반을 두문불출했다. 그때만 해도 모두 "장광효는 끝났다"고 했다. 그의 전성기도 그렇게 막을 내리는 것 같았다.
4일 서울 청담동 쇼룸에서 만난 장광효는 "인생 돌아보면 별것 없다"고 웃었다. 지난달 말 그는 서울 을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컬렉션 쇼를 치렀다. 수백 명의 관객으로 패션쇼장은 터져나갈 듯했다. 고양이와 새, 꽃과 나무 같은 그래픽, 리본과 주름 같은 여성복의 요소를 섞은 젊은 감각의 남성복이 무대를 메웠다. 환갑의 디자이너가 내놓은 작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장광효는 "지금까지 쇼를 치른 숫자가 아마도 100번은 넘을 것"이라면서 "때론 거짓말처럼 잘나갔고, 때론 악몽처럼 암울했지만 모든 건 다 지나간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할 일을 꾸준히 하다 보면 결국 다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고 했다.
30년을 건너온 이 자리
―그 '제자리'가 어디입니까.
"남의 눈치 안 보고 내 일하는 내 자리죠, 뭐. 이 동네(청담동)에선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웃음). 그동안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우고, 밤마실 안 다니면서 내 일을 해왔으니 이만하면 잘한 것 같아요(웃음). 처음 디자이너가 됐을 때만 해도 나도 남들처럼 밤마다 시대의 아이콘들과 어울려 놀아야 하는 것 아닌가, 화려하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었어요. 30년 지나고 돌아보니 그런 건 다 부질없더라고. 망할 때건 잘될 때건, 그저 꾸준히 신문 읽고 책 읽고 바느질하면서 내 할 일 하고 살다 보면 다시 내 몫이 주어지는 거예요."
―말이 쉽지,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했는데 일이 손에 잡히나요.
"맞아(웃음). 그건 맞아요. 나도 처음엔 잠이 안 왔어요. 그런데 어떡해요, 현실이 눈앞에 있으니 냉정해져야죠. 일단 어음을 막아야 하니까 부동산을 처분해서 빚을 갚았고 직원들을 정리했죠. 사업을 키우는 것도 어렵지만 줄이는 것도 쉽지는 않더라고. 그리고 나서 논현동에 반지하 작업실을 얻었어요. 돈도 돈이지만 당분간 좀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어요. 그곳에서 인생이 뭔지, 내가 기댈 곳이 어딘지 한참 생각했죠. 천천히 답이 나오더라고. 결국 다 변해도 내가 기댈 곳은 가정이고 아내라는 걸. 그리고 돈을 벌건 못 벌건 관계없이 나란 사람은 어찌됐건 쇼를, 디자인을 평생 하고 싶어한다는 걸…(웃음)."
장광효는 전남 강진의 비교적 유복한 집에서 자라났다. 부모님은 3남2녀 중 막내아들이었던 장광효를 손찌검 한 번 해본 적 없이 귀하게 키웠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관학교에 입학하길 바랐지만 장광효는 화가나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서울대 서양학과 입시에 떨어지고 나서 국민대 산업미술과에 입학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대학 의상학과는 여학생만 뽑던 시절이었다. 장광효는 입학 후 학교 교무처에 찾아가 "남자도 패션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부전공으로 의상학을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결국 그는 최초로 의상학을 부전공으로 택한 남학생이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프랑스 파리 퐁텐블로 아트스쿨로 유학을 떠났다. TV 광고에서 배우 남궁연이 에펠탑 아래에서 모카신을 신고 발목을 까닥거리는 모습이 그렇게 근사해 보일 수가 없었다. "파리에서 3년을 공부하면서 멋도 알고 옷도 알고 인생도 알게 됐지(웃음)." 한국으로 돌아와선 제일모직의 남성복 디자이너로 취직했다. 장광효라는 디자이너가 옷을 꽤 잘한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논노로 다시 스카우트됐고 이후엔 레드 옥스에서도 일했다. 그 무렵 성악하는 여동생 남편의 연주회에서 자신과 동갑인 소프라노 성악가 길애령(목포대 교수)을 만났다. 키가 훤칠하고 입매가 우아한 여성이었다. 한눈에 반했고 결혼했다. 장광효는 "아내를 그때 만난 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했다.
디자인, 그건 결국은 사랑
―어떤 점에서 그렇죠.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고 살 수가 있어요. 디자이너들은 본래 자기중심적이거든요. 자기 작품만, 자기 기분만 생각하죠. 그러다 보면 사람을 쉽게 분별하지도 못하고, 유혹에도 쉽게 움직여요. 내 아내는 그런 면에서 무서운 여자예요(웃음). 큰 잔소리 없이도 내 옆에서 중심을 잡아주거든요. 다른 잡념 없이 일상에 충실히 살 수 있도록 도와줘요. 요즘도 나는 매일 아침 7시 반에 꼬박꼬박 일어나 신문 세 개를 다 읽고, 클래식 음악을 듣고 걸어서 회사에 출근해요. 잡생각 없이 일하다가 퇴근해서 밤 11시 반쯤 잠들고요. 그래도 아쉽거나 심심하지 않아요. 나처럼 건전하게 살면서, 에너지를 온전히 디자인에 쏟을 수 있는 건 정말이지 행운이죠."
장광효의 브랜드 '카루소'는 아내 길씨가 "이탈리아 테너 가수 엔리코 카루소의 이름을 따서 브랜드 이름을 지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해서 나온 것이다. 장광효는 "아내는 모든 면에서 나의 선생님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
―2005년에는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출연할 때 부인이 반대하기도 했다죠.
"디자이너가 얼굴이 너무 알려지면 제 할 일을 제대로 못 한다고 말리고 그랬죠. 결국 출연하긴 했지만 아내 충고가 사실 맞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참 사람들이 알아볼 때도 정신 차리려고 노력했지(웃음). 내가 그때 붕 떠서 여기저기 들어오는 광고나 영화 출연 제의 다 받아들였으면, 아마 지금까지 디자인 못 하고 살았을 거야. 아내 말 들어서 손해 볼 게 없는 거지. 돌아보면 그래요. 디자인? 그거 별거 아냐. 사랑하고 이해하고 행복을 찾아나가는 과정, 그게 디자인이지 뭐."
카루소 옷을 입고 광고에 나온 가수 조용필.
언더도 있지만 하이도 있다
장광효의 쇼는 단순하지 않다. 가령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가 그린 그림 '화성행행 반차도'의 풍경을 남성복 컬렉션으로 새롭게 풀어서 옮겨 놓는 식이다. 그의 남성복엔 그래서 때론 자개장식, 도포자락, 노방(비단의 일종)과 색동의 요소 같은 것도 과감하게 섞인다. 장광효는 "역사를 열심히 공부해서 쇼에 섞는 것을 좋아한다. 패션쇼가 납작해지는 것이 싫다"고 했다.
―30년 동안 남성복을 하면서 숱한 편견과 싸워온 디자이너의 목소리처럼 들리네요.
"말도 마세요. 여성복은 시장도 크고 여성복을 원하는 사람도 많지만, 남성복은 달라요. 입지가 좁아도 너무 좁죠.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 남성복을 한다는 건 투사가 돼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때론 얕잡아보고, 때론 깎아내리지. 그럴수록 나는 스스로 격을 높여야 하는 거예요. 스트리트 패션 같은 언더문화가 요즘 유행이라고 하지만, 난 여전히 궁중문화나 우리나라의 고급스러운 전통문화를 녹일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남성복도 하이패션이 돼야 하니까. 역사의식이 있는 옷을 만들어야 존중받죠."
―입버릇처럼 '패션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고 하셨죠.
"쇼만 하고 돌아서는 건 이제 좀 공허해서요. 내가 남은 재산 다 털어서 우리나라 패션 디자이너들을 위한 박물관을 하나 짓고 싶어요. 돈은 많이 벌어도 봤고 잃어도 봤으니, 굳이 더 남길 필요 있겠어요. 탈탈 털어 좋은 곳에 쓰고 가면 좋은 거죠. 그렇게 박물관 하나 지어놓고, 아내 손 잡고 어디 멀리 긴 여행이나 떠나고 싶어요."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4/14/2017041401687.html